여행 산문집이 추방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설을 쓰겠다고 한 달치 짐을 꾸려 상하이에 내렸는데, 비자를 준비하지 않아 입국장도 밟지 못하고 돌아왔다. 준비된 여행자를 자처하던 사람이 가장 기본적인 절차에서 걸린 것이다. 이 실패담을 첫 장에 놓은 선택이 책 전체의 태도를 정한다.
이어지는 글들은 여행지 정보와는 거리가 멀다. 왜 떠나는가, 떠나 있는 동안 나는 누구인가를 파고든다. 낯선 도시에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않는 상태, 직함도 이력도 지워진 채 그냥 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경험을 저자는 해방으로 읽는다. 돌아올 곳이 있어야 여행이 성립한다는 지적도 오래 남았다.
다만 기대는 조정할 필요가 있다. 분량이 얇고 아홉 편의 산문이 느슨하게 묶여 있어 편차가 크다. 여행 에세이를 찾아 든 사람에게는 소설가의 자기 이야기가 길게 느껴질 수 있다. 문장은 여전히 좋은데, 덮고 나서 손에 남은 게 무엇인지는 한참 생각해야 했다.
결론을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 이 형식의 미덕이기는 하다. 다만 그 덕에 어떤 글은 좋은 도입만 남기고 끝나 버린다. 겪은 일과 거기서 끌어낸 생각 사이의 거리가 편마다 들쭉날쭉해서, 한 권으로 묶였을 때 인상이 고르지 않다. 별점을 낮게 매긴 이유는 여기에 있지, 글이 나빠서가 아니다.
가볍게 읽히지만 가벼운 책은 아니다. 다음에 공항으로 가는 길에 다시 펼칠 것 같다.